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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조선 2012년 1월호] 아시아를 하나로 묶겠다"-사토요지 원아시아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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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사토 요지 원 아시아 재단 이사장“아시아를 하나로 묶겠다”

글 : 徐喆仁 月刊朝鮮 기자
사진 : 徐炅利 月刊朝鮮 기자

⊙ 일본 최대 파친코 기업 다이남 그룹 총수, 2003년 아시아 공동체 만들기 위해 사재 100억 엔 출연
⊙ 아시아 31개 대학에 ‘아시아 공동체론’ 강의 개설, 학교당 연구비 7000만원, 장학금 1000만원 지원
⊙ 와세다대 출신의 엘리트, 도박 이미지 강한 파친코를 가족형 오락으로 바꿔 일본 파친코 업계의
    신화가 되다
⊙ “북한은 곧 붕괴될 것, 식량난 대비해 몽골에 대규모 농장 조성해야”

사토 요지(佐藤洋治)
⊙ 66세. 와세다대(早稻田大) 상학과 졸업.
⊙ 다이에이 근무. 現 다이남홀딩스 회장.
⊙ 저서: 《생명의 말》, 《주옥의 말》, 《아시아 공동체의 창성을 향해》 등.

취재지원 = 서은내 月刊朝鮮 인턴기자 pubmonth@chosun.com 

  “여러분, 안녕하세요. 원아시아(One Asia) 재단의 사토 요지라고 합니다.”
 
  반백의 노신사가 서툰 한국말로 20대 젊은 학생들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희고 갸름한 얼굴에 군살 없는 체형 탓이었을까. 연회색 수트와 짙은 바이올렛 컬러의 넥타이가 더 없이 잘 어울렸고 세련돼 보였다.
 
  지난 12월 2일, 한양대 제2공학관 내 200석 규모의 강의실이 빈 자리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꽉 찼다. 담당 교수는 “교양 강좌인 ‘아시아공동체론’은 인문대, 경영대, 사회대 등 다양한 전공의 학생들이 수강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날은 한국계 일본인 사토 요지가 특강을 위해 강단에 섰다. 그는 일본 최대 파친코 업체를 자(子)회사로 거느린 다이남 그룹의 총수이자 원아시아 재단 이사장이다. 이 강좌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고 있는 후원자이기도 하다.
 
 
  아시아의 EU 꿈꾸며 재단 설립
 
사토 요지 원아시아 재단 이사장으로부터 ‘아시아 공동체 창성을 위하여’라는 주제의 특강을 듣고 있는 한양대 학생들.

  원아시아 재단은 2003년 사토 이사장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기 위해 사재 100억 엔(한화 약 1300억원)을 출연해 설립한 비영리 민간단체다. 아시아 국가 간 사회, 문화, 경제적 교류를 통해 EU(유럽 연합)와 같은 아시아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이 재단에는 세 가지 활동 원칙이 있다. 민족·국적을 불문하는 것, 사상·신앙·종교를 구속하지 않는 것,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다.
 
  재단은 이 원칙을 지키기 위해 한국·일본·중국·몽골·방글라데시·키르기스·카자이스탄 등 7개국 12개 도시에 비정부 기구인 원아시아클럽을 설립했고, 아시아 31개 대학에 연구비 지원 및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다. 한국에선 한양대를 비롯해 고려대, 건국대, 방송통신대, 인천대, 우석대, 호남대 등 13개 대학이 이 재단의 후원을 받고 있다.
 
  재단 측은 “대학별로 한 학기 강좌에 500만 엔(한화 약 7000만원)씩 지원하고 있고, 수강생 중 우수 학생들을 선발해 총 1000만원의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양대는 수강생 200명 중 80여 명이 최대 50만원까지 받았다.
 
  이날 사토 요지 이사장이 준비한 특강 주제는 ‘아시아 공동체 창성(創成)을 위하여’다. 강의는 동시통역사를 거쳐 1시간30분 동안 일본어로 진행했다.
 
  “8년 전 아시아 공동체를 꿈꾸며 원아시아 재단을 설립했습니다. 이후 아시아를 하나로 묶기 위한 활동을 하면서 다양한 문제와 직면했지요. 특히 민족·인종·국적·종교 등은 커다란 장벽이었습니다. 오늘은 어떻게 하면 이 장벽을 뛰어넘을 수 있을지에 대해 몇 가지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사토 이사장에 따르면 장벽을 뛰어넘으려 깊이 고민하다 보면 공통적으로 4가지 철학적 테마와 만나게 된다고 한다. ‘자기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생명이란 무엇인가’ ‘우주 전체는 누가 어떤 목적으로 만들었으며, 최종적으로 어디를 향해 가는 것인가’ 등이다. 사토 이사장은 이 중 ‘자기란 무엇인가’, 즉 자아(自我)에 대해 동서고금의 철학자들이 남긴 말과 풍부한 예화들을 인용해 설명했다. 심오하면서도 흥미진진했던 강의의 핵심은 ‘나는 사회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고, 사회는 국가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으며, 국가는 세계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오늘날 세계가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식량·에너지·환경 문제는 너와 나를 넘어 하나가 돼야 해결될 수 있음을 역사적이면서 철학적으로 풀어낸 강의였다.
 
  사행산업인 파친코에 대한 선입견 때문일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행동으로 보여주는 그의 신념에 놀랐고, 인간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사유와 통찰에 놀랐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재일 한국인의 아픔 덕에 성공
 
  사토 요지 이사장은 재일 한국인 3세다. 그는 1945년 대동아 전쟁 중 피란지였던 일본 혼슈(本州)의 이바라키현(茨城縣)에서 태어났다. 경북 김천 출신의 아버지 이한기(李漢基)씨와 대구 출신의 어머니 김순화(金順和)씨 사이의 1녀4남 중 장남이었다.
 
  “아버지는 열두 살 되던 해에 할아버지를 따라 현해탄을 건넜습니다. 1930년대 초였지요. 집안의 차남이었던 할아버지께서는 장남이 아닌 까닭에 식솔을 이끌고 일본으로 가는 작은 어선을 탔습니다. 젊은 나이에 해볼 만한 도전이고 모험이었습니다만, 다소 무모했지요. 주머니에 돈도 없고, 일본에 이렇다 할 연고도 없었거든요. 그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 시절 많은 한국인이 생계 문제로 현해탄을 건넜다. 일본어는커녕 일본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는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정해져 있었다. 현지인들이 꺼려 하는 고된 육체노동이었다. 그의 조부(祖父)도 예외는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작은 어선을 타고 일본 남쪽 규슈(九州)에서부터 닥치는 대로 노동을 하며 북쪽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러곤 홋카이도(北海道)에 정착해 막일을 하는 틈틈이 고철이나 빈병 같은 고물을 수집해 내다 팔곤 했지요. 고등학교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저 역시 방학 때면 홋카이도에 가 할아버지 일을 돕곤 했습니다.”
 
  병약했던 그의 아버지는 조부 일을 돕지 못해 일찌감치 홋카이도를 떠나 도쿄에 정착했다. 아버지는 일용직 삶에서 벗어나려 설계 공부를 했지만 재일 한국인으로서 일자리를 얻기란 쉽지 않았다.
 
  “아버지께선 대동아 전쟁 후 잡화상을 시작했습니다. 홋카이도에 가서 미역이나 생선 말린 것 등 해산물을 떼어다 파는 일이었지요. 제품을 고르는 안목이 있는 데다 성실했기 때문에 아버지의 가게는 인기가 있었습니다. 장사가 잘되었죠.”
 
  부지런한 부모 덕에 그는 풍족하진 않지만 끼니 걱정 없이 유년기를 보냈다. 학교에서는 공부도 곧잘 하는 데다 운동에도 소질이 있어서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재일 한국인이라는 차별 때문에 정체성 앓이를 심하게 했다. 그는 당시 자신의 가족이 받은 차별에 대해서는 언급하기를 꺼려 했다. 그저 “재일 한국인으로서 겪어야 했던 아픔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자신이 있는 것”이라고 말할 뿐이었다.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는 부모님을 보며 더욱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정체성의 혼란이 왔을 때는 독서를 통해 극복하려 노력했죠. 인간이 ‘태어난 의미’ ‘살아가는 의미’ 등을 철학 서적에서 찾아내려 했습니다. 인간의 본질에 대한 관심은 대학 졸업 후 사업가의 길을 걸으면서도 늘 머릿속에 넣고 다녔죠. ‘인간이란 무엇인가’의 해답을 얻고자 틈틈이 책을 봤고, 세계적인 석학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가업이니 10년만 해보자”
 
강의가 끝난 후 우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수여하고 있는 사토 이사장.

  그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아버지는 잡화상으로 번 돈을 모아 파친코 가게를 냈다. 사업 수완이 좋은 데다 부지런했기 때문에 파친코 가게 역시 잘되었다. 자신감이 붙은 아버지는 가게를 확장하기 위해 더욱 열심히 일했지만 국적이 한국이라는 장벽 때문에 늘 제자리걸음이었다. 사업상 포기하거나 양보해야 할 일이 많았다. 결국 아버지는 그가 중학교에 입학하던 해에 국적을 일본으로 바꾸었다. 한국계 귀화 일본인이 된 것이다. 그렇다고 두 개이던 파친코 가게가 열 개, 스무 개로 늘어난 것은 아니지만 그의 가족은 물론 아버지 형제들까지 남부럽지 않게 살 정도는 되었다.
 
  사토 이사장은 일본에서 도쿄대 진학률이 가장 높은 명문 가이세이(開城) 중·고교를 나와 와세다대(早稻田大) 상학과에 입학했다. 고교 시절에는 럭비 선수로 활동하며 기초 체력을 길렀고, 대학 시절에는 유통회사 CEO를 꿈꾸며 대기업 입사 준비를 착실히 했다. 그 덕에 일본 유통회사의 양대 산맥인 다이에이 신입사원 공채에 당당히 합격했다. 하지만 이 회사를 오래 다니지는 못했다. 아버지를 대신해 가업인 파친코 가게를 운영해야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제가 대학에 다닐 때 졸업하면 가업을 이으라고 말씀하셨지만 저는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대학까지 나온 마당에 사회적으로 이미지가 좋지 않은 파친코 가게에 묶여 있고 싶지 않았고, 저 나름 꿈이 있었기 때문이죠. 저는 유통업계 최고의 수퍼바이저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지병으로 돌아가셨고, 집안에 나 외에 파친코 가게를 운영할 사람이 없어서 할 수 없이 2년 남짓 다닌 회사에 사표를 냈지요.”
 
  아버지는 그가 24세이던 1970년 폐결핵 악화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아버지에 대해 “매우 성실하고 독립심이 강한 분”이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는 종전 후 결핵을 얻어 구멍이 난 한쪽 폐를 거의 들어낸 채 생활했습니다. 폐활량이 정상인의 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데도 쉬는 법 없이 열심히 일했죠. 대부분의 한국인이 적을 두고 있던 조총련이나 민단 그 어느 단체에도 가입하지 않은 채 독립적으로 사신 분이었습니다.”
 
  결핵이 악화되면서 누워 지낸 시간이 많았던 아버지는 단파 라디오를 옆에 끼고 주식 방송을 즐겨 들었다. 전화로 주식 거래를 할 정도로 투자에도 밝았다. 아버지가 남긴 유품 중에는 주식이 상당히 많았다고 한다. 파친코 가게를 맡은 후 그도 한동안 주식 투자에 몰두했으나 곧 그만두었다. 땀 흘려 번 돈의 가치가 얼마나 큰 것인지 주식 투자를 통해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물려준 주식을 1년 만에 모두 처분하고, 파친코 사업에만 전념했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파친코 사업도 딱 10년만 할 생각이었어요. 아버지가 물려준 가업이니까 10년만 참고 견디어 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한 셈입니다. 그런데 하다 보니 파친코 업계에 대한 일본 사회의 부정적 시각을 바꾸고 싶다는 오기가 생기더군요.”
 
 
  파친코의 대중화에 도전
 
다이남 그룹은 일본 전역에 350개의 파친코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그가 아버지의 가게를 물려받을 당시 파친코 업계에 대한 일본 사회의 시각은 지극히 부정적이었다. ‘한국인들이 야쿠자의 보호를 받으며 운영하는 도박 업소’라는 인식이 팽배했다. 그 때문에 파친코 업자나 종업원은 자동차나 집을 사기도 힘들고, 금융기관에서 돈을 빌리기도 어려웠다. 그는 “파친코 업계의 속사정을 알게 되자 사회적 편견이나 차별에 대한 반발심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정당한 방법으로 사업을 하고 있는데도 편견이 있고 차별이 있다면 업계에 몸담고 있는 누군가가 솔선수범해서 이를 없애줄 작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처음 10년 동안은 사업을 키우기보다 이미지 변신을 위한 체질 개선에 주력했지요. 업계 최초로 수익의 투명성을 위해 주식시장에 상장했고, 종사자들의 권익 증진을 위해 노동조합도 만들었습니다. 경찰의 도움을 받아 조폭과의 거래도 근절했고요. 그 덕분에 무디스 같은 신용평가 기관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지요. 금융기관에서 돈을 빌릴 수 있게 된 겁니다.”
 
  10년 동안의 체질 개선 후 대졸 사원을 대거 채용했다. 이들의 입사는 자녀가 취업을 원하는데도 파친코 업계라고 무조건 반대하던 부모들의 인식이 달라졌다는 방증이었다. 매장 수를 하나 둘 늘려가기 시작한 것은 그의 나이 40이 되어서부터다. 그 무렵 일본에는 ‘폭력단 퇴치법’이 발효됐다. 그는 경찰과 함께 파친코 업계를 맴도는 폭력단 근절에 앞장섰다. 그 때문에 폭력단의 표적이 됐다.
 
  “폭력단은 일일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협박과 공격을 가했습니다. 그들은 새 매장을 오픈하는 날 덤프트럭을 몰고 와 매장을 그대로 밀어버리거나, 불을 지르곤 했어요. 심지어 인분을 퍼붓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그들이 내미는 손을 뿌리쳤지요.”
 
  그는 ‘사회적으로 평가를 받지 못하는 기업은 결국 망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또한 ‘파친코 사업이 마이너리티이기는 하지만 꾸준히 노력하면 사회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이 믿음으로 사행성 도박 이미지가 강한 파친코를 온 가족이 즐길 수 있는 가족형 오락 산업으로 바꿨다. 파친코 업계 최초로 200개 매장 시대(2004년)를 열었고, 2007년에는 업계 1위(매장 규모 기준)로 도약하는 성과를 올렸다.
 
  “2007년 직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파친코에서 도박 개념을 빼는 혁신을 시도했습니다. 1시간에 2만 엔(27만여 원)이 필요한 파친코를 단돈 1000엔(1만3000원)만 있으면 누구든 맘껏 즐길 수 있는 대중오락 공간으로 변신시키고자 한 것이죠.”
 
 
  연매출 1조여 원 회사로 성장
 
사토 이사장은 파친코 매장에 최초로 건강 개념을 도입, 가족 놀이터로 변화시켰다.

  일부 파친코 매장을 저렴한 가격의 가족형으로 꾸미기 시작하자 업계 관계자들은 하나같이 “실패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그들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파친코 매장을 가족형으로 바꾼 지 3개월이 지나자 손님이 몰리기 시작했다. 가족 혹은 친구 단위로 몰려와 파친코를 즐기는 이들이 많았다.
 
  이에 탄력을 받은 그는 매장 내 흡연 장소와 시간을 한정하고, 공기 정화 시스템을 설치하는 등 파친코 매장 환경을 좀 더 쾌적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2007년 155억 엔(2100억원)이었던 영업이익이 2008년에는 360억 엔(4400억원)으로 껑충 뛰었다.
 
  다이남홀딩스는 현재 350개의 파친코 매장 외에 레스토랑, 여행, 부동산 관리 등 15개 기업을 자회사로 거느리고 있다. 최근 매출은 8700억 엔(2009년 기준, 1조2000억원)이다. 파친코만 놓고 볼 때 매장 규모로는 현재 업계 1위고, 매출 규모로는 재일교포 한창기씨가 운영하는 ‘마루한’에 이어 2위다.
 
  원아시아 재단 관계자에 따르면 현재 다이남 그룹에 근무하는 정규직원은 4000여 명(비정규직 포함 2만여 명)이다. 이들의 대부분은 4년제 대학 졸업자들이며, 사토 이사장의 경영철학과 인간적인 면모에 끌려 입사한 명문대 출신이 많다고 한다.
 
  사토 이사장의 경영철학은 ‘투명 경영과 공평한 기회 부여’이다. 이를 위해 그는 반기에 한 번씩 경영 실적을 공개하고 있고, 평사원과 눈을 맞추기 위해 사장실을 따로 만들지 않았다. 전용차 없이 직원들과 함께 지하철로 출퇴근했으며, 관료 출신을 영입해도 예우하지 않았다. 젊은 인재들 중에는 그의 ‘열린 사고’에 매료돼 다이남을 최고의 직장이라며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재단 관계자는 “교포 중심이었던 다이남의 구성원이 최근 들어 일본인 중심으로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사토 이사장은 “재일교포와 한국계 일본인이 주도하는 파친코 업계가 일본 사회에서 인정받고 세계 평화에 공헌하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꿈꾸고 있다”고 말했다. 원아시아 재단 설립은 이 꿈을 현실로 옮기기 위한 의지의 첫걸음이다.
 
 
  북한 문제에도 관심 많아
 
  사토 이사장은 작년부터 그룹 경영권을 동생인 이종하(李鍾河)씨에게 맡기고 재단 업무에 매진하고 있다. 아시아 31개 대학에 개설돼 있는 아시아 공동체론 강좌나 학술회의에 참가하느라 연중 절반을 해외에서 생활한다고 한다. 최근 들어 몽골을 자주 왕래하는 그는 얼마 전 “북한이 붕괴되면 가장 먼저 발생할 식량난에 대비해 몽골에 대규모 농장을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해 주목을 받았다. 북한이 붕괴되면 식량난으로 이웃나라인 한·중·일이 영향을 받을 것이므로 주변국이 힘을 합쳐 이에 대비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몽골은 북한이 중국이나 러시아보다 깊은 우호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는 유일한 국가입니다. 저희가 아는 몽골 인사 중 북한을 수시로 드나드는 분이 있는데, 그분이 감지한 여러 가지 정황상 북한이 붕괴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더군요. 북한이 붕괴되면 가장 시급한 문제가 식량난이고, 이에 대한 부담은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이나 러시아, 일본 등에도 미칠 것입니다. 이때를 대비해 주변국이 힘을 모아 몽골 동쪽의 광활한 휴농지(休農地)를 개간해 북한 주민들이 농사를 짓도록 하자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몽골 동부 지역에는 옛 소련이 지배했던 100만ha의 농지가 있다. 이곳은 당시 강제 이주시킨 몽골 노동자들이 거주하며 보리와 옥수수를 재배했던 곳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몽골은 농산물 수출국이었다. 하지만 소련이 붕괴되고 민주화 물결이 일면서 노동자들이 모두 울란바토르로 빠져나가 농지는 초원이 되었다. 사토 이사장은 “100만ha면 한국 농지의 절반 규모”라며 이렇게 말했다.
 
  “북한을 국제사회로 끌어내는 데 식량 문제 해결만큼 훌륭한 카드는 없을 겁니다. 북한의 식량난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지난 8월 김정일이 러시아 방문 중 메드베데프 대통령에게 농사지을 땅을 빌려달라고 요청했다가 거절당한 일도 있지 않았습니까. 바로 이런 때 6자회담에 몽골을 넣어 7개국이 협력하면 북한의 식량 문제 해법이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한국이 주도권을 갖고 진행하는 게 중요하다고 봐요.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저희 재단도 민간 차원에서 적극 지원할 생각입니다. 남북통일은 아시아를 하나로 만드는 중요한 업무 중 하나니까요.”
 
지난해 원아시아 클럽 도쿄가 주최한 총회.

 
  200개 대학 지원할 예정
 
  현재 원아시아 재단이 주력하는 사업은 아시아 지역 대학에 ‘아시아 공동체론’ 강좌를 개설하는 것이다. 앞서 밝힌 대로 이미 31개 대학에 개설했고, 40여 개 대학이 개설 준비 중에 있다. 사토 이사장은 “5년 내에 200개 대학에 강좌를 개설할 계획”이라며 “그렇게 되면 3000명의 교수가 아시아 공동체 관련 네트워크를 형성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아시아 공동체 관련 기존 학회나 연구소가 많습니다만 대부분 동아시아 중심입니다. 동아시아는 물론 중앙아시아와 러시아까지 포함하는 아시아 공동체를 지향하는 단체는 저희가 유일할 거예요. 아시아 각국의 대학에서 강의하며 이 부분에 동의하고 공감하는 교수가 많다는 것에서 힘을 얻고 있습니다.”
 
  이 많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할 터이다. 우선 대학에 지원하는 예산을 어떻게 마련하는지 궁금했다. 이 부분은 재단 관계자가 대신 설명해 줬다.
 
  “현재 재단 출연 기금 100억 엔에서 연 2억5000만 엔 정도의 금융 수익이 발생합니다. 이 정도면 70개 대학 지원이 가능한 액수죠. 이를 기준으로 볼 때 3년 후면 200개 대학 지원이 가능하다는 계산이 어렵지 않게 나옵니다.”
 
  8년 전 재단에 출연한 100억 엔은 사토 이사장의 사재가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출연 당시 가족들의 반대가 없었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슬하의 3男, 유산은 없어
 
  “애초부터 저는 아이들에게 재산이나 회사를 물려줄 생각이 없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교육해 왔기 때문에 아이들 역시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죠. 그것은 제 동생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저희 형제가 유산을 나눠 가졌다면 오늘의 다이남 그룹은 존재하기 어려웠을 거예요. 흩어진 것을 하나로 모았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고, 형제간의 우애도 지켜낼 수 있었지요. 저희 형제는 40여 년이 흐른 지금껏 재산 문제로 다퉈본 적이 없습니다.”
 
  사토 이사장은 명문 게이오대 출신 부인과의 사이에 3남(男)을 두었다. 20, 30대인 이들은 다이남 그룹에 적을 두고 있지 않다. 결혼해 가정을 꾸린 장남과 차남은 다른 회사에 재직 중이고, 아직 미혼인 3남은 교토대학 박사 과정에 있다고 한다.
 
  아시아 7개국 12개 도시에 설립된 원아시아 클럽은 각자 독립적으로 활동하며 아시아 공동체의 밑거름을 만들고 있다. 원아시아 클럽 서울의 경우 아시아 지역 유학생 장학금, 다문화 가정 돕기, 한일문화교류, 한중 청소년교류 등의 활동을 펼치고 있다.
 
  사토 이사장은 이들 클럽을 하나로 묶어주는 학술회의를 1년에 한 번씩 개최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도쿄에서 열렸는데, 아시아 각국에서 교수, 예술가, 정치인, 학생 등 400여 명의 관계자들이 참가했다고 한다.
 
  재단의 활동 사항들을 설명할 때 유독 신나 하는 그에게 “원아시아 재단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이상이 뭐냐”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
 
  “저희 재단의 목표는 명확합니다. 아시아 공동체 창성에 기여하는 것이죠. 저희 재단이 주역은 아닙니다. 아시아의 젊은 학자와 정치가, 학생 등이 주역이죠. 그들이 아시아 공동체를 창성해 세계 평화에 기여해 주길 바라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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